피아트 탈리에로 빌딩

CC BY-SA Architectuul

1930년대는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식민지 시기였으며, 에리트레아의 수도 아스마라에는 수많은 이탈리아식 건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은 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건축물로 손꼽힙니다. 이 건물은 원래 Fiat 자동차의 주유소로 설계되었고, 그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이탈리아 미래주의 건축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 건물명: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Fiat Tagliero Building)
  • 위치: 에리트레아 아스마라
  • 건축가: 주세페 페타치(Giuseppe Pettazzi, 이탈리아 토목기술자)
  • 스타일: Futurism
  • 건립: 1935 – 1938


피아트(Fiat) 자동차의 주유소로 설계된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은 1938년에 완공되었으며, 이탈리아의 건축가 주세페 페타치(Giuseppe Pettazzi)에 의해 설계되었습니다. 당시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였고, 아스마라는 ‘작은 로마’로 불릴 만큼 이탈리아의 문화와 예술이 깊게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은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운동과 기술적 진보를 아프리카 대륙에 구현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CC BY-SA Architectuul


건축적 특징

이 건물은 비행기를 형상화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합니다. 중앙의 타워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진 캔틸레버 구조의 날개는 약 30미터에 이르며, 지지대 없이 자체적으로 무게를 견디는 혁신적인 기술을 보여줍니다. 건물 전체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시도였습니다.

페타치는 이 디자인을 통해 속도와 운동, 그리고 기술적 발전에 대한 낙관주의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건물의 전면에는 피아트의 로고와 함께 고객을 맞이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내부는 주유소와 정비소, 사무실 등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은 이탈리아의 예술 운동인 미래주의(Futurism)의 철학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작품입니다. 미래주의는 기계, 속도, 현대성을 중요시하며 전통적인 형태와 관습을 거부하는 예술 사조로, 페타치는 이러한 가치를 건물에 담아냈습니다. 비행기를 닮은 디자인은 하늘을 향한 인간의 도전과 기술의 진보를 상징합니다.

문화적 및 역사적 의의

1890년에서 1941년 사이에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 하에서 유럽에 너무 아방가르드한 건축가들은 에리트레아 고원에서 현대 도시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기 위해 “아프리카 오리엔탈레 이탈리아나” 지방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페타치의 계획은 지방 당국에 의해 구조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간주되었고, 건설 현장에서 페타치는 감독관의 머리에 총을 겨누어 원래 계획을 고수하도록 강요했다고 합니다. 건설이 마침내 끝났을 때 페타치는 리볼버를 머리에 대고 한쪽 날개 위에 서서 걸작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맹세하고 노동자들에게 지지 기둥을 제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기둥을 제거하면 건물이 건축가와 함께 무너질 것이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미리 주저했습니다. 놀랍게도 날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은 모든 식민지 강대국이 그랬던 것처럼, 에리트레아 인구를 억압하고 착취했던 파시스트 독재 정권의 산물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은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로, 아스마라의 독특한 도시 경관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꼭 방문해야 할 장소로 추천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에리트레아의 건축적 다양성과 역사적 복합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이 건물은 에리트레아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식민지 시절의 유산이지만, 에리트레아인들은 이 건물을 자신들의 도시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017년, 아스마라의 다른 모더니즘 건축물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이는 국제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왜 에리트레아일까? 왜 그의 집에서 그렇게 먼 땅이었을까? 시모네타 페타치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얼굴이 밝아진다. “그는 젊고 일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는 대답합니다. “그는 새로운 경험을 찾고 있었고 에리트레아는 그와 다른 많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기회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미래주의의 한 사례가 된 주유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 주유소는 책과 잡지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역사가와 미술 학자들의 인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아버지라는 인물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종종 착각하고 그가 당시의 미적 취향에 대한 찬사로 그런 유형의 건축물을 선택한 건축가라고 확신합니다.” Simonetta Pettazzi가 설명합니다. “사실, 그는 엔지니어였고, 확실히 그 시대의 아이였지만, 매우 정확한 기술 프로젝트에 고정되어 있었고, 당시로서는 똑같이 대담했습니다. 그는 철근 콘크리트의 강도를 확신했습니다.

CC BY-SA Architectuul

보존

현재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에리트레아 정부와 국제 기구들은 이 건물의 보존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건물의 구조적 안정성과 외관을 유지하기 위한 복원 작업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미래 세대에게도 그 가치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역사와 예술, 기술의 교차점에서 탄생한 걸작입니다.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를 아프리카의 땅에 구현함으로써, 건축의 한계를 넘어선 혁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 독특한 디자인과 건축 기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아스마라의 하늘 아래에서 빛나는 이 건물은 앞으로도 지속될 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아스마라: 현대주의 아프리카 도시(Asmara: A Modernist African City)

해발 2,000m가 넘는 곳에 위치한 에리트레아의 수도는 1890년대부터 이탈리아 식민지 세력의 군사 전초기지로 발전했습니다. 1935년 이후 아스마라는 정부 건물, 주거 및 상업용 건물, 교회, 모스크, 유대교 회당, 영화관, 호텔 등에 당시 이탈리아의 이념을 적용한 대규모 건축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이 건물은 1893년부터 1941년까지 다양한 단계의 계획으로 탄생한 도시 지역과 계획되지 않은 원주민 지역인 아르바테 아스메라와 압바샤웰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의 초기 모더니즘 도시주의와 아프리카의 맥락에서 그 적용을 보여주는 특별한 사례입니다. Fiat Tagliero Building은 현재 아스마라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 Municipality of Asmara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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